고청 서기의 얼이 서린 그곳
충현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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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청 서기의 얼이 서린 그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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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정(박약재)
연정(박약재)

박약재는 고청 서기가 처음 터를 잡고, 제자들을 가르쳤다는 곳이다.  

충현서원에서 북쪽으로 100미터 남짓한 곳에 고즈넉하게 자리하고 있다.  고청 서기가 학문연구와 후학양성을 시작한 이래 이 연정에서 시작된 명성은 널리 알려져 공주는 물론 여러 고을에서 유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당시 고청 서기의 제자는 천여 명에 달하였다고 한다.


학생들이 많아지자 조금 떨어진 곳에 공암정사를 세웠는데 이것이 다시 공암서원을 거쳐 충현서원으로 거듭나게 되었다. 공암서원이 세워진 후에는 연정을 ‘박약재(博約齋)’라고 지칭하였다. ‘박약’은 『논어』, 「옹야」의 ‘박문약례’에서 취한 것으로 널리 배움의 참뜻을 구하고, 예에 맞는 실천을 강조한 문구이다. 당시 학생들이 기숙하며 생활하던 곳은 ‘진수’, ‘천리’라고 하였다. 

지금의 박약재는 1794년(정조 18)에 지어진 것이다. 박약재 앞에는 1987년에 세운 서기의 유허비(遺墟碑)가 있다.


(위)박약재 현판, (아래)연정 현판
(위)박약재 현판, (아래)연정 현판
연지
연지
(왼) 고청선생 유허비, (오)거북골 유지 암각문
(왼) 고청선생 유허비, (오)거북골 유지 암각문

백여 년 전까지만 해도 박약재 주변에는 넓은 못과 버드나무가 길게 늘어서 있었고, 20여 년 전에는 이 연지에서 잡은 잉어를 서기의 제향 때마다 올렸다고 한다. 

연지(蓮池)는 서기가 제자들과 즐겨 산책하였다는 이야기가 전해오며, 그가 세상을 떠난 후에는 제자들이 스승의 위패를 모시고 매년 봄·가을에 제사를 올렸다.  

고청 선생이 가족을 이끌고 지리산을 나와 처음 자리 잡은 곳은 일명 ‘거북골’이라는 지역으로 지금의 반포면 온천리이다.


서기는 이곳의 지명을 따서 스스로를 구당(龜堂)이라 불렀다고 한다. 계룡산 서쪽의 진주봉 아래의 바위에는 ‘고청서선생유지(孤靑徐先生遺址)’라고 새겨진 문구가 여전히 남아 있다. 고청 서기는 1591년(선조 24) 11월 13일에 세상을 떠났다. 그의 묘는 고청봉 남쪽 산기슭에 정부인 영천이씨(永川李氏)의 묘와 함께 자리하고 있다. 

묘역의 중앙에는 박지화가 쓴 묘갈비와 1755년(영조 31)의 묘갈명이 함께 세워져 있다.  또한 부인의 묘 동쪽으로 1989년에 세워진 신묘비와 신묘갈명이 있다. 비석 중 가장 처음에 세워진 ‘고청거사서공묘갈명(孤靑居士徐公墓碣銘)’이 있는데 비문은 생전에 친우였던 박지화가 작성하고, 행장은 서행원과 윤봉구가 지었으며, 글씨는 조헌이 썼다.

고청 서기의 묘소
고청 서기의 묘소
고청 묘갈명(1755)
고청 묘갈명(1755)